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가와 요시노부 (문단 편집) == 여담 == * 그는 말년에 >"과거 죽을 각오를 한 적이 세 번 있었다" 고 술회했는데, 그 중 하나가 '[[금문의 변]]'에서의 초슈 토벌이었고, 또 하나는 신정부군이 에도에 진군해 왔을 때였다. 오사카성에서 도망쳐 돌아온 요시노부는 우에노 간에이지 대자원에서 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할복 발언을 한 장기간에 걸쳐 문제가 된 조약 칙허의 해결때의 일이었다.[[https://toyokeizai.net/articles/-/447916?page=3|#]]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단행하자 [[사카모토 료마]]는 요시노부에게 >"쇼군님의 심중을 깊이 헤아린다. 용케도 단행되었다. 나는 맹세코 이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고 적어 편지를 보냈다. 료마는 이 편지를 보내고 한 달 뒤 암살되었다.[[https://twitter.com/yamagishimadam/status/1444552790970277888?s=20|#]] 참고로 당시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가 누군지 몰랐었다. * "이 세상을 잠시의 [[꿈]]이라고 들었지만 생각하면 긴 세월이 되었도다(この世をば しばしの夢と 聞きたれど おもへば長き 月日なりけり)"라는 [[사세구]]를 남기기도 했다. * 건강을 챙기고 몸을 가꾸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50세가 넘은 요시노부에게 [[자전거]] 타기는 신체를 단련하는 운동의 하나였고, 게다가 [[카메라]]를 비롯한 서양의 물건에 관심이 있었다.[[https://www.shizuoka-cyclecity.jp/history/|#]] * 향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해 에도 막부 쇼군 중 가장 [[장수]]했다. 두 번째로 장수한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74세). * [[약학]]서를 기초로 스스로 약을 조제해, 컨디션에 따라 복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취미도 스스로 약을 조제하는 것이었다.] 식생활도 [[보리밥]]에 [[된장]] 등 건강식만 먹었다고 한다. 유약해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식성도 엄청 좋았다고 하며 [[참치]], [[장어]]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https://intojapanwaraku.com/culture/137677/|#]] >'개양환'으로 시나가와 바다에 도착한 요시노부는, 정월 12일 아침에 상륙해 하마고텐에 들어가자, 푸성귀와 같은 안색의 막각(막부의 최고 수뇌부)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인을 불러들여 '긴 수도 생활과 유람으로 몸의 지방이 빠져 뼈가 산산조각 나 버린 것 같다. 장어구이를 사 오너라'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레이칸지마(霊岸島)에 있는 다이코쿠야(大黒屋)에서 구입하라'고 가게까지 지정했다고 한다.('도쿠가와 가문에 전해지는 도쿠가와 400년의 뒷면 양생훈'에서)[[https://intojapanwaraku.com/culture/137677/|#]]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ic_yoshinobu-1.jpg|width=100%]]}}} || || {{{-1 {{{#fff ▲ '''당시 자전거를 즐겨 탄 요시노부를 그린 그림'''}}}}}} || 당시로는 흔치 않던 [[자전거 덕후]]로 유명했다. 쇼군 자리에 물러난 이후, 그가 시즈오카 거리에서 자전거로 달리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1887년 2월 5일의 시즈오카 다이무신문에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이 도쿄에 자전거를 주문해, 그 후 타고 다니고 있다"[* 당시 1대 300엔. 현재 가치로 600만 엔. 이즈음 요시노부는 양아들한테서 1달엔 1,000엔씩 생활비를 받고 있었는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자전거를 구입하는데 쓴 셈이다.]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하인들이 쓴 《가부일기》에 의하면, 요시노부가 자전거에 빠진 것은, 40대 후반부터 50대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일기에는 자전거를 타는 행위를 오늘도 자전거로 운동했다고 적고 있다.[[https://www.shizuoka-cyclecity.jp/history/|#]] * 당시 많이 먹지 않았던 [[돼지고기]]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부타이치토노"(豚一殿)였다. 당시 일본인은 공식적으로는 육류를 먹지 않았다. 당당하게 먹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보고 사람들이 놀래서 지은 별명이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걱정하지 않았고, 요코하마 항구가 개방되면 재빨리 고기를 주문했다고 한다.[[https://diamond.jp/articles/-/127411|#]] * 그는 [[검은콩]]을 매일 아침 100알(200알이라는 설도 있음) 먹고 [[우유]]를 마시기도 했다. 이는 히토츠바시 가문에 양자로 보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다수 보낸 편지 중에 검은 콩은 하루에 200알씩 먹고 우유도 먹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던 건강법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우유는 일반적인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음료였다. 그런데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토 번에 목장을 만들 계획을 일찍이 세우고 우유를 원료로 한 버터 등의 가공품도 개시했다. * 일본 대중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반응으로는 쇼군으로서 전쟁을 포기하고 도망을 쳤다는 부정적인 반응과 일본 전체로 보면 내전을 크게 만들지 않았고, 프랑스나 영국 등의 서양 열강들의 개입에 의한 영향도 최소한으로 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뉜다. 심지어 그를 [[애국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다. * [[제일국립은행]]의 초대 행장이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막부 말기에 근황파의 지사로 활동을 시작하여 8월 18일 정변 후에 요시노부를 섬겼다. 마침내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었을 때 시부사와도 막신[*幕臣 쇼군을 직접 주인으로 섬기는 무사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10,000석 미만의 고쿠다카를 보유한 [[하타모토]] 또는 고케닌을 지칭하는데,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지만 고케닌은 쇼군을 알현할 수 없었다. 즉 농민 출신이었던 시부사와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하타모토가 된 것이다.]이 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귀국한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제 네가 좋아하는 길을 가라'고 말하며 독립시켰다. 시부사와는 요시노부가 퇴위한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서도 요시노부와 관계를 계속 가진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시부사와 이외에는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등과도 교류를 했다.] 이들의 관계는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에서 잘 그려졌다. 시부사와는 요시노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활동을 계속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후 일본 은행이나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했다. 일본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틀을 잡아 현대에 와서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된다. 요시노부가 발탁한 인재 중 최고의 아웃풋이라고 볼 수 있다.[* 2024년에 새로 바뀌는 [[일본 엔]] 1만엔의 지폐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내가 옛 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의 전기를 편찬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히토츠바시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신은 아니다. 또, 그 녹을 받았다고 해도, 그 기간은 겨우 5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죽음을 각오한 생명을 요시노부공에 의해서 구하여, 내가 오늘 있는 것은, 오로지 히토츠바시 사관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큰 은혜를 차마 잊을 수 없고, 또 세간에서 요시노부 공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혹시 잘못해서 후세에 전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참으로 안되고 유감스럽고 후세를 그르치는 일도 많을 것 같아 내가 기꺼이 요시노부 공의 전기를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 >[[시부사와 에이이치]][[https://ameblo.jp/historykunibo/entry-12688685483.html|#]] *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저술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徳川慶喜公伝)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도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억이 명확한 것이 놀라울 뿐'이라고 적혀있다. * 말년에는 [[황태자]]였던 [[다이쇼 덴노]]와 친해져서 '케이키씨' '전하'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매년 한 번은 만나는 사이였다고 한다.[[https://www.webchikuma.jp/articles/-/456|#]] 다이쇼 덴노는 요시노부가 가진 서양총을 마음에 들어 '제발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요시노부가 그 총을 좋아했기 때문에 비슷한 것을 어딘가에서 구입해서 진상했다고 한다.[[https://www.excite.co.jp/news/article/Bizjournal_202111_post_264226/?p=3|#]] * 후년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요시노부의 전기 편찬을 목표로 해, 요시노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 좌담회를 실시했다. 이때 요시노부는 >"죠슈는 처음부터 적대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지만 사쓰마는 배신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長州は最初から敵対していたから許せるが、薩摩は裏切ってゆるせない)" 고 말했다.[[https://historystyle.work/archives/3164|#]] *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키는 150cm 전후였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에도 시대 남성들의 평균 키가 155cm였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4cee92c7c97273eb1dc1efccbf9ba69-1200x630.png|width=100%]]}}} || 시즈오카 슨푸성의 살던 시절의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의 이름은 한(ハン). 그가 직접 찍은 사진도 있다.[[https://shizubi.jp/exhibition/101211_03.php|#]]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시노부 그림.jpg|width=100%]]}}} || || {{{-1 {{{#fff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은거하면서 그린 그림[* 조사를 통해 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두꺼운 종이에 손수 만든 유화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풍경이 그려진 곳 등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요시노부가 직접 사진을 많이 촬영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조합되어 실제로는 없는 이상의 풍경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http://www.spmoa.shizuoka.shizuoka.jp/_archive/collection/item/O_172_1310_J.html|#]]][[http://spmoa.shizuoka.shizuoka.jp/collection/museum_collection/detail/2402|#]]'''}}}}}} || 《그 후의 요시노부》(저·이에치카 요시키/치쿠마 문고)라는 책에 의하면, 그의 취미는 수렵, 매사냥, 투망, 가마우지 낚시, [[바둑]], [[쇼기]], [[노래]], 노, 소고, 서양화 그리기, [[당구]], [[자수]], 사진 찍기 등으로 취미는 놀랄 정도로 다방면에 걸쳤다고 한다. 슨푸성에서 살았을 때는 신하들과 사이클링을 하기도 했다. 또 [[현미경]]에 손을 대기도 했다. 야담가나 [[곡예사]]나 [[마술사]]를 집으로 부르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 [[인력거]], [[자전거]], [[전화기]], [[축음기]], [[자동차]] 등이 등장하면, 즉시 구입했다고 한다. 취미를 즐기며 30년 가까이 산 [[시즈오카]]에서는 '케이키님' '케이키씨'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고 한다.[[https://www.news-postseven.com/archives/20210614_1666467.html?DETAIL|#]] 도쿠가와 요시노부 자신도 '케이키'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8774_sub_1_fcafcb68031881b4f276b425aff9f8f3.jpg|width=100%]]}}} || || {{{-1 {{{#fff ▲ '''금리어수위 총독 재임 당시 촬영한 사진'''}}}}}} || 서양의 새로운 문화가 일본에 들어왔을 무렵,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 '서양에 물들었다'라고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새로운 기법에 의한 [[유화(미술)|유화]]와 사진 촬영을 상당히 좋아했다. 특히 사진 촬영에 대해서는, 종종 자신이 모델이 되어 촬영을 시키는 등, 에도 막부 말기부터 강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쇼군 취임 이전인 1864년부터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교토 고쇼를 호위하는 금리어수위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시대에, 2장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한 장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진으로, 애독서인 《[[자치통감]]》이 옆에 놓여져 있다. 다른 한 장은 미제 후장 총포를 놓고 촬영한 것이다. 두 사진 모두 마치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 듯한 초상화 사진이다. 이 사진의 촬영자는 판명되지 않았지만, 당시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은 여러 명의 [[사진사]]를 거느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 쇼군 사임 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촬영]]을 즐기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진 촬영을 시작한 계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마지막 [[미토 번]]의 번주로, 형제 중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이복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하인에 의해서 기록된 《도쿠가와 게이키 가부일기》(徳川慶喜家扶日記)에 의하면, 1893년 이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시즈오카에 사진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던 [[사진가]] 도쿠다 코키치(徳田孝吉)를 자택으로 불러, 사진 촬영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시즈오카 구노야마 산과 시미즈 항, 아베 강 등에서 빈번하게 사진 촬영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복동생 아키타케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다녔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kitake_Tokugawa.jpg|width=100%]]}}} || || {{{-1 {{{#fff ▲ '''이복 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 || 요시노부는 촬영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피사체를 사진에 담았다. 시즈오카에서 사진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던 무렵의 작품으로는 시미즈항 [[부두]] 풍경과 아베가와 철교를 달리는 [[증기기관차]] 등 명소를 촬영한 풍경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또, 도쿠가와 요시노부 자택 근처에서 아이들을 촬영한 사진도 남아있다. 1905년에는 도테이 저택 아래를 흐르는 사카가와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모습을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담은 1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사진 찍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기술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잡지에 투고했지만 채택된 적은 없다. 사진작가 나가노 시게이치(長野重一)는 세미 프로 수준이라고 평했다. 다만 당시에는 카메라 자체가 잘 보급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사진도 적어서인지 그의 사진은 당시의 시대 풍경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는 평가받고 있다. 현대의 프로 사진사들은 주로 혹평을 하지만 말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1884794092780595177_3165269b1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8380-bdbbc.jpg|width=100%]]}}} || || {{{-1 {{{#fff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찍은 도쿄의 아이들[* 코히나타 다이로쿠텐초 저택 부지내의 연립 주택에 사는 아이들을 촬영한 것이다.]'''}}}}}} || {{{-1 {{{#fff ▲ '''사진을 찍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뒷모습을 찍은 이복 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 || *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지시한 [[농민]]에게 감사를 담아 기도하는 것을 매일의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상 위에 둔 농인형에 한 젓가락의 쌀을 올려 손을 모으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https://www.city.mito.lg.jp/001373/001374/0/bunkazai/p018954.html|#]] *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의 심복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에게 식사 시중을 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서 >"시동(小姓 귀인 곁에서 시중을 든 소년)의 직장은 밥상의 사환을 시작으로 하여 머리 묶는 법까지 터득해야 하는데, 히라오카 엔시로의 처음 시종을 배명케 할 때에는 무엇 하나 익숙해지지 못하고 (중략) 공(요시노부)께서 보시어 식사 시중을 드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게 국자를 잡고 그릇을 들고 그 모양을 보여 자세히 가르쳐 주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고죠(小姓)라고 시중드는 하인인 히라오카 엔시로가 1822년생으로, 1837년생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보다 열 다섯 살이 많았다. 어린 소년인 요시노부가 어른인 엔시로에게 식사 시중을 드는 예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실은 엔시로는 요시노부의 친부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아들이 잘못을 지적해 줄 수도 있는 가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서 측근인 후지타 토코(藤田東湖)에게 부탁해서 뽑은 인재였다. 엔시로는 상급무사 [[하타모토]] 집안 출신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고 평가한 두뇌명석한 수재로 그가 암살당해서 죽기 전까지 요시노부의 지혜주머니 제갈량 역할을 했다. 암살당한 이유도 그가 요시노부의 곁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당대 기준에도 준수한 외모였다. 당시 요시노부는 [[미청년]]으로 [[오오쿠]]들로부터도 '미려하다'라고 칭찬이 자자할 정도의 잘생긴 외모였다.[[https://toyokeizai.net/articles/-/424568?page=3|#]] 주일영국공사 [[어니스트 사토]]는 요시노부를 >"쇼군은 내가 지금껏 본 일본인 중에서 가장 [[귀족]]적인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피부가 희고 앞이마가 빼어나며 뚜렷한 콧대를 가진 훌륭한 [[신사]]였다.(将軍は、私がこれまで見た日本人の中で最も貴族的な容貌をそなえた一人で、色が白く、前額が秀で、くっきりした鼻つき——の立派な紳士であった)" 라고 평가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도쿠가와 요시노부 다임러.jpg|width=100%]]}}}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타고 다닌 [[다임러]] 자동차. 전속 운전사 안도와 함께 이 자동차로 외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운전사는 당시 매우 적었던 특수직업이었다.[[https://twitter.com/yamagishimadam/status/1429410481156935681|#]] * 요시노부와 [[일본 철도]]에 대해 이런 일화가 남아 있다. 동사의 토요시마선(이케부쿠로-타바타=현야마테선의 일부, 1903년 개업)은 스가모에 있는 요시노부의 저택 앞에 노선을 깔아, 정거장(=역)도 설치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개업 1년 반 전에 약 2km 떨어진 코이시카와에 이사해 버렸다. 현재 JR [[스가모역]] 앞의 요시노부 저택 터에 서 있는 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사하는 것은) 바로 옆을 철도가 다니도록 결정되어, 그 소음을 싫어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는 수많은 연기와 소리를 내었고 정거장에는 인파가 몰렸다. 《그 후의 요시노부》를 쓴 이에치카 요시키 오사카 경제대 명예교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은 당시와 현대는 놀랄 정도로 달랐다. 고요한 삶에 익숙해진 기쁨을 견딜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요시노부는 13년 전에도 비슷한 형태로 이사를 겪었다 .쇼군 퇴위 후의 20년 남짓, 은거 생활의 장소로서 온 시즈오카 저택이, [[도카이도 본선]] 연장으로 개설되는 시즈오카 역의 눈앞이 되었기 때문이다.[[https://www.yomiuri.co.jp/national/20211009-OYT1T50242/|#]]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시즈오카를 떠난 후 그의 남은 저택을 매입해 [[호텔]]로 짓기도 했다. 호텔의 이름은 아오이 호텔(葵ホテル). 1900년 11월 25일에 개업했으나 1905년 11월 8일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34032320_photo.jpg|width=100%]]}}}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전쟁터에서 입었던 진바오리 '白羅紗葵紋付陣羽織'. 현재 도쿄 에도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https://matsudo.keizai.biz/amp/headline.php?id=547&__twitter_impression=true|#]] * 2015년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요시노부를 실제로 봤다고 주장하는 105세의 노인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https://news.livedoor.com/article/detail/10355881/|#]][[https://twitter.com/downtownwed/status/980018509773090817|#]] 1910년생 여성으로 어린 시절 도쿄 [[니혼바시]]에서 요시노부가 행렬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대하드라마의 시대 고증도 한 사이토 요이치)에 의하면, 이 무렵 말년의 요시노부는, 니혼바시를 방문했거나 니혼바시의 문자의 휘호를 하고 있거나 하는 등 니혼바시와 관계가 깊어,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로서, 이 증언은 확실한 사료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 방송은 이 증언에 도달하기 위해서 100세가 넘는 고령자들을 닥치는 대로 인터뷰했기 때문에, 다른 역사 인물들([[오쿠마 시게노부]]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목격 정보나, [[관동대지진]]이나 [[중일전쟁]] 등의 증언들도 손에 넣고 있어 예능 프로그램답지 않은 엄청난 역사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래서 이 방송은 극찬을 받아 [[갤럭시상]]을 받기도 했다. * 2018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인 이데 쿠미코(井出久美子)가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의 생활을 엮은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자서전은 손녀의 시선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적었고, 전쟁 이전까지 살았던 약 3,000평의 넓은 부지에서의 생활과 남편과의 사별, 전후 일변한 일상생활 등을 적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거처로 하고 있었던 도쿄시 코이시카와구 코히나타 다이로쿠텐쵸우(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카스가)의 저택에서 자랐다. 광대한 부지에 지어진 저택에는 가족을 포함해 50명이나 되는 동거인이 있었다고 한다.[[https://fujinkoron.jp/articles/-/103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EPnQWkUYAYG89V.jpg|width=100%]]}}}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찍은 [[열차]] 사진. 일본인 최초로 열차를 찍은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https://twitter.com/vkj7o1e1/status/1460264979383287809|#]]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ic_ogawa_jihei01.jpg|width=100%]]}}} || || {{{-1 {{{#fff ▲ '''후케츠루(浮月楼)'''}}}}}}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시즈오카에서 20년 가까이 칩거하면서 살았던 집이 바로 후케츠루(浮月楼)다. 이곳은 요시노부의 신하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주군이었던 요시노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를 갖춘 곳으로, 1869년 시부사와가 일본에서 첫 [[주식회사]]라고 불리는 '상법회소'를 창립해, 스스로 행장격으로서 지휘를 한 것도 이 후케츠루였다.[[https://ab.jcci.or.jp/article/40345/|#]]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일본의 근대 다실(寄屋)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요시다 이소야(吉田五十八)다. 요시노부가 도쿄로 떠난 이후에는 다른 사람한테 팔려서 [[요릿집]]으로 사용됐다.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들렀다. 대표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사이온지 긴모치]],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이노우에 가오루]],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가 있다. 현재는 고급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으며, 시즈오카의 각종 행사 장소로 쓰이고 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쇼기]] 명인전 도전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대국인 A급 순위전 최종일제대국의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2021년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에서 요시노부를 매우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그 효과를 봤는지 에도 막부 쇼군 인기투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꺾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https://nlab.itmedia.co.jp/research/articles/307323/|#]] * 2017년에 조사했던 에도 시대 쇼군 인기투표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요시무네]] 다음인 3위였다. 망국의 군주격인 인물인데도 인기가 많은 편이다.[[https://rankingoo.net/articles/life/20170908/3|#]] *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동상이 2개가 있다. [[미즈호 은행]] 미토 지점 앞에 동상이 있으며[[https://www.its-mo.com/poi/KNK_ZPOI-00000000000003224154/|#]], 센바공원(千波公園) 안에 요시노부의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요시노부의 동상이 있다.[[https://amanaimages.com/info/infoRF.aspx?SearchKey=81522031980|#]] 두 개의 동상 모두 어린 시절의 요시노부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했다. * [[니혼바시]] 다리에 걸린 간판의 글씨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쓴 것이다.[[https://tokuhain.chuo-kanko.or.jp/detail.php?id=2266|#]] 초대 니혼바시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인 요시노부에게 휘호가 부탁했다. 당시의 도쿄시장인 [[오자키 유키오]]가 "에도로부터 도쿄로 전쟁을 겪지 않고 무혈 개성할 수 있던 것은 오로지 굴욕을 참아, 패를 인정하고 공순 자세를 관철한 요시노부공의 덕분이다. 말하자면 도쿄의 제일가는 은인이야말로 휘호를 기원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요시노부에게 의뢰를 했다고 한다.[[https://nihonbashi-kabou.kokubu.co.jp/nihonbashi/nihonbashi-trivia/nihonbashi-trivia_03|#]] *요시노부의 하녀 코지마 이토(小島糸)의 회상에 의하면, 현미빵에 관심을 가져, 먹지도 않으면서 자주 사러 가게 했다고 한다. 또 [[반합]]으로 밥을 짓는 데 열중했는데 [[알루미늄]]이 인체에 해롭지 않을까 의심해 은제 제품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https://serai.jp/hobby/1022274/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